[이달의 책]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이들에게(최미진 선생님)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 강준만,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인물과 사상사)
부산 한국조형예술고 최미진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는 과거와 달리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구조라며 한탄한다. 나 역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교육으로 사회적 지위가 바뀌지 않고, 부와 학벌이 그대로 세습되는 것을 우려했던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의 아이들은 가정에서 많은 지원을 받아 학습 결과에서 월등한 성취를 보이며 앞서 나가고,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해 학습 역량이 낮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의욕마저 없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이는 단지 교육 현장에서 느껴지는 수준이 아니라, 정확한 통계 수치로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가정의 학생들이 대부분 소위 ‘SKY’라 불리는 명문대에 진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염려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 교육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우리들의 염려와 고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 속에는 두 가지의 잘못된 관념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우선 개천에 대한 비하 의식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상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제부터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각자 사는 곳에서 각자의 행복을 찾으면 되는 것인데, 그 속담은 개천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담겨 있기에 무조건 넓고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을 지니게 만든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을 용과 미꾸라지로 구분 짓는 발상의 문제이다. 신분제 사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용과 미꾸라지로 구분한다. 또한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용이 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된다는 두려움을 가진 채 살고 있다. 결국 이 두 가지 그릇된 관념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들 용이 되기 위해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고, 서울로 모여들고 있다. 그로 인해 지방은 더욱 황폐해지고 있으며, 지방 스스로도 그 황폐화를 앞장서서 부추기는 우스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 '인재육성정책'이자 '지역발전전략'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기 지향적이다. 자기 지역 출신 학생이 서울 명문대에 진학해 서울에서 출세하면, 즉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을 차지하면, 그 권력으로 자기 지역에 좀 더 많은 예산을 준다든가 기업을 유치하는 데에 도움을 줄 거라고 본다. 서울 중앙부처나 대기업에 자주 로비를 하러 가는 각 분야의 지방 엘리트들은 자기 고향 출신을 만났을 때 말이 통하고 도움을 받은 경험을 갖고 있기에, 이와 같은 '지역발전전략'은 움직일 수 없는 법칙으로 승격된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건 지역발전전략이 아니라 '지역황폐화전략'인데도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아니 지역보다는 가족의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일부러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서민층 학부모마저도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는 꿈을 꾸기에 그런 지역발전전략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확률에 개의치 않고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는 걸 진보로 생각할 뿐, 개천에 남을 절대 다수의 미꾸라지들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다. 미꾸라지들의 돈으로 용을 키우고, 그렇게 큰 용들이 권력을 갖고 '개천 죽이기'를 해도 단지 그들이 자기 개천 출신이라는 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부 식민지의 기묘한 자학이요, 자해라 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본질적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출세하지 못한 채 개천에서 살아가야 하는 다수 미꾸라지들에게 불필요한 열패감을 안겨 주면서 그들을 불행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깨야 한다.
부끄럽게도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을 듣고 말하면서 이 속담 안에 들어 있는 불편한 전제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두 노력하면 용이 될 수 있고,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스스로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게 되면서 수없는 성공담들을 목표로 스스로를 경쟁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교육 역시 거기에 매몰되어 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서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입시가 끝나고 난 후 학교마다 내거는 ‘○○대학 합격 ○명’ 등의 플래카드가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름난 대학에 입학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장학금을 주는 것이 얼마나 지방을 죽이는 일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계삼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교육의 근원적인 불행이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외에는 다른 삶을 향한 출구가 이 사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즉, 교육은 누가 용이 될 것인가 하는 걸 가려내는 선발의 의미만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온갖 갑질들의 행태와 그 원인을 파헤치는 내용을 보면서 나 역시 겉으로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행동한 적이, 아니면 적어도 교양 있는 사람인 척하기 위해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우월감을 느낀 적이 있지 않았을까 반성하게 되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많이 이야기하는 요즘, 아무리 최첨단 인공 지능 로봇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많은 부분들이 기계로 대체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의 감성과 협동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교육계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지금처럼 용을 만들기 위해 용쓰지 말고, 개별 존재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내 안의 갑질이 발동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모두가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게 아니라, 현 사회 통념상 나쁜 일자리에 대한 보상을 늘려 줌으로써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차이를 줄여 나가는 게 아닐까? 이와 관련,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하종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덜란드의 한 중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더니 벽돌공이라 답했던 게 기억난다.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일터에서 온종일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일할 수 있는 벽돌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거였다. 이 아이가 즐겁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벽돌공의 수입이 대학 교수의 수입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노동기본권이 보장돼 직종 간 임금 격차가 해소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사라지면 학문에 뜻 없는 아이들까지 기를 쓰고 대학에 갈 일이 사라진다. 노동 문제가 해결돼야 교육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다."
부디 우리나라 아이들도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매일매일이 행복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